성 자크 오노레 샤스탕(鄭牙各伯, Jacques Honore Chastan) 신부는 18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827년 신부가 되어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833년 마카오에 도착했다. 조선으로 떠나는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조선 포교를 자원하였고, 1836년 12월 31일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의 안내로 변문을 통과하여 이듬해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각 지방 교회를 다니면서 상제옷을 입고 산길을 헤매었으며, 음식과 일상생활에 대한 불편은 물론 밤새도록 성무를 집행하는 고통을 다른 선교사와 같이 겪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후, 이미 체포된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확대되어 신자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교사들의 자수를 권고하자 순명하여 모방 신부와 같이 자수하였다. 9월 21일 새남터에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와 함께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밑바탕이 되었다.
나이 : 35세 / 순교연월일 : 1839년 9월 21일 / 순교장소 : 새남터 / 형벌 : 군문효수
성 요셉 장주기(張周基)는 일명 ‘낙소’라고 하며, 경기도 수원의 느지지에서 태어났다. 1862년 영세, 입교한 후 친척들의 반대와 박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와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어서 빨리 훌륭한 신부가 많이 해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봉사하였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배론신학교를 습격하여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자 제천 근처의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30일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고, 위앵 신부, 오메르트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으로 전능하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나이 : 63세 / 순교연월일 : 1866년 3월 30일 / 순교장소 : 갈매못 / 형벌 : 군문효수
성 프란치스코 최경환(崔京煥)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의 아버지로 충청도 홍주의 다래골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앙인의 본분을 지켜왔다. 결혼한 다음에는 보다 열심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마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곳 외교인들의 탄압으로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을 거쳐 과천 수리산에 정착, 교우촌을 건설하고 오로지 신앙 생활에만 몰두하였다. 1836년, 큰 아들 최양업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성인의 신심은 자신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끼쳐 괄괄하고 불같은 성격을 믿음의 정신으로 노력하여 고쳤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본래 성품이 온순한 것으로 알고 온화한 그의 성품에 탄복했었다 한다. 최양업 신부에 의하면 “아버지는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깊은 묵상과 신심서적 읽기에 열성을 보여 교회의 가르침에 놀랄 만한 지식을 취하였다”라고 하며 또한 “아버지는 천주에 대한 열성과 한가지로 사람에 대한 박애심이 열렬하여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가난한 이웃을 위해 몫으로 남겨 놓으셨다”라고 전한다.
1839년 수리산 공소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으며 교우들을 위로 격려하면서 돌보아주던 중 그해 7월 31일에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들과 일가 등 40여 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아들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어 신학공부를 시켰다는 죄가 더 추가되어 남달리 혹심한 고통과 형별을 받았다.
태장 340도, 곤장 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그해 9월 11일 최후로 곤장 50도를 맞고 그 다음날 올중에서 일생을 마쳐 순교의 놀라운 기쁨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다.
나이 34세 / 순교연월일 : 1839년 9월 12일 / 순교장소 : 포청옥 / 형벌 : 옥사
성 베드로 최형(崔炯)은 일명 ‘치장’으로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 남문 밖에서 살았다. 14세 때 입교하였으며 동생 최방제는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마카오에 유학하여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형 최수는 1866년 절두산에서 참수당하였고, 큰누이는 평생을 동정으로 살았다.
이러한 독실한 교우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1836년 모방 신부의 복사로 여러 해 동안 신부를 보필하며 선교에 힘썼다. 그 후 1839년 기해밖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을 하며 묵주 만드는 일과 교회 서적 간행을 도왔다. 베르뇌 주교의 입국 후에는 교회 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 서적 출판에 크게 공헌하였다.
1866년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면서 적발된 많은 교회 서적들 때문에 체포되어 3월 9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동료 전장운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형 성인의 사형 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 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으니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성인의 거룩한 고집에 머리가 숙여진다.
나이 : 52세 / 순교연월일 : 1866년 3월 9일 / 순교장소 : 서소문밖 / 형벌 : 참수
성 요셉 한재권(韓-)은 세례명이 베드로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자는 원익(元益, 혹은 원여)이다.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열심히 살았으며 진잠 지방에서는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박해를 피해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로는 아무런 직책 없이 헌신적으로 교회일을 도우면서 모든 이의 모범이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전라도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어 이해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문지, 손선지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부친이 친구를 통하여 석방 교섭을 벌이는 한편 옥까지 찾아와 배교할 것을 간청하였지만 “배교란 말은 부당합니다. 아버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없습니다”하고 말하면서 거절하였다.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참 아버지이신 천주님을 직접 뵈옵고 영원히 흠숭하게 되었다.
나이 : 31세 / 순교연월일 : 1866년 12월 13일 / 순교장소 : 전주 숲정이 / 형벌 : 참수
성 루가 황석두(黃錫斗)는 ‘재건’이라고도 불렸고 충청도 연풍(延豊)의 양반 가문에서 자라나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다가,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하였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하였고, 이에 감동한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덕행이 뛰어나고 교리 지식이 풍부하여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 생활을 하였으며,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 번역과 교회 서적 출판에도 참여하였다. 1866년 3월에 먼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다블뤼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간 황석두는 결국 함께 체포되어, 3월 30일 갈매못에서 5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나이 : 53세 / 순교연월일 : 1866년 3월 30일 / 순교장소 : 갈매못 / 형벌 : 군문효수
성녀 막달레나 허계임(許季任)은 성녀 이정희, 이영희 자매의 모친으로 경기도 용인 지방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편 이씨는 완고한 외교인으로 천주교를 몹시 싫어하였으므로 남편 몰래 시누이 이매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두 딸과 함께 입교하였다.
1839년 3월 성사를 받으러 서울로 가서 시누이와 두 딸이 사는 집에 머무르고 있던 중,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과 김누시아 등과 함께 순교를 결심한 뒤 4월 11일 그들과 같이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수차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기꺼이 이를 이겨내고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녀 막달레나 허계임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두 자매를 훌륭히 키우고,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혹형을 기꺼이 받았다는 점 밖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 성인을 흠모하는 교회로서는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두 순교자의 어머니로서 자신 또한 순교자가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그를 따르려는 이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이 : 66세 / 순교연월일 : 1839년 9월 26일 / 순교장소 : 서소문밖 / 형벌 : 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