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나루와 잠두봉
역사의 터전이자
교회사의 순교성지, 절두산
양화진 잠두봉이
절두산 순교지가 되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 북쪽에 위치한 양화진은 순수한 우리말로 풀이하면 ‘버드나무 꽃이 핀 나루터’란 뜻이다. 그리고 우뚝 솟은 봉우리는 생김새가 마치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이라 불려왔다.
양화나루 잠두봉은 15세기 조선 태종 때부터 17세기 인조 때까지 주로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의 고관, 사대부들이 별장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던 이름난 명승지였다. 특히 ‘양화나루에서 밟는 겨울 눈’, 즉 양화답설(楊花踏雪)은 한도십영(漢都十詠)의 하나로 손꼽히며 많은 문인과 명사들의 시에 자주 등장하곤 하였다.
지리적으로는 서울에서 양천·김포를 거쳐 강화에 이르는 중요한 통로이자, 삼남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조운선(漕運船)과 한강 유역의 각종 어선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양화나루는 도성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물품들을 조사하고 도적(盜賊)들을 단속하던 장소이자, 군사기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영조 30년(1754)에는 이곳에 정식으로 군사 진영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한강을 도성의 방어선으로 삼고 주요 나루를 거점으로 삼아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프랑스가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 양화진까지 진출하였던 병인양요(丙寅洋擾)로 인해 양화진의 군사기지로서의 중요성은 다시금 부각되었다.
병인양요는 1866년 초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려 프랑스 신부 9명을 포함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처형하자, 프랑스 함대 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가 조선으로 보복 원정을 나서면서 한-불 간 군사적 무력 충돌이 일어난 사건이다. 로즈는 먼저 양화진까지 올라와 지세를 정찰하고, 수로를 탐사하고 돌아간 후 군함 7척과 총병력 1천여 명과 함께 조선 원정길에 올라 강화부를 점령하였으나 조선군과의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천총(千總)에 대패하여 철수하고 말았다.
비록 프랑스 군대는 패전하여 조선에 큰 인명피해는 남기지 않고 함대를 철수하였으나,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강화시키고, 천주교 박해를 부추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부터 새남터나 서소문 밖에서 이루어지던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을 갑자기 양화진에서 집행하게 되었다. 대원군과 조정 대신들이 프랑스 함대가 침략하여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왔고, 강화도에 원정할 수 있도록 천주교 신자들이 도왔으므로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기 때문이다.
1867년까지 양화진 잠두봉에서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으며, 이때부터 양화진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가 잘린 봉우리’라는 뜻에서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병인박해 그리고
병인양요
1784년 학자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부터, 천주교회는 조선의 전통적 가치, 관습적 사고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인간 존중과 평등을 추구하는 천주교의 교리는 조선 사회의 근간이었던 신분제와 유교질서를 흔든다고 여겨졌다. 또한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1791년 신자 윤지충이 교황청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웠던 진산사건 이후 조선의 천주교회는 기나긴 박해 속에 수없이 많은 순교자를 냈다.
신유년(1801), 기해년(1839), 병오년(1846)의 극심했던 박해가 철종 때부터 잠시 누그러지자 새로이 천주교를 믿는 교우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고, 배교하고 살아남은 교우들도 회개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왔으며 조정의 신하 중에도 믿음을 가지게 된 이가 적지 않았다. 또한 18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해 온 것을 계기로 흥선대원군과 조정의 대신들은 조선교구의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인들이 러시아인들을 물리치게 해준다면 종교의 자유를 승인하겠다는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교우들은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의 반대파 대신들은 대원군이 천주교와 교섭한 사실을 비난했고, 권력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대원군은 오히려 천주교를 탄압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하였다. 신앙의 자유를 찾으려던 천주교회의 노력은 도리어 처절한 박해를 불러오고야 말았으며,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1866년 2월 한성의 베르뇌 주교, 홍봉주 등의 체포를 시작으로 박해는 가속화되어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프랑스인 신부들과 교우들이 처형되었고 포졸들이 배교자를 앞세워 각처의 교우촌을 약탈·유린하였다.
박해가 더 확대된 데에는 1866년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을 타고 두 차례나 아산만에 나타나 상륙한 남연군 묘 도굴사건과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 호와 제너럴 셔먼 호가 평안도 해안과 대동강 하구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한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의 보복 원정인 병인양요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절두산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프랑스 선교사와 교류한 일이 있거나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 함대와 관련된 혐의를 받는 신자들이었다. 절두산 최초의 순교자 이의송(프란치스코), 김이쁜(마리아) 부부와 아들 이붕익(베드로)은 서양 세력을 불러들였다는 죄목 아래 군문효수형을 받았고, 강요한은 체포될 당시에 선교사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중죄인으로 분류되기도 하였다. 교회 순교록을 통해 추정되는 병인박해 당시의 절두산 순교자 수는 200명 내외이고, 기록으로 확인되어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순교자 수는 29명이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의 시복과 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절두산 순교자 하느님의 종’은 모두 13명이다.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그리고 절두산순교성지
1846년 한국의 첫 번째 사제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이하 김대건 신부)의 치명 순교가 있은 후, 100년이 지난 1946년 전국 단위의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이하 현양회)가 결성되었다. 현양회는 처절했던 병인년의 박해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는 이 땅에 김대건 신부 광장과 기념관을 지어 숭고한 순교정신을 보전·계승하기로 결의하였다. 현양회는 전국의 신자들로부터 성금을 모으기 시작하여, 1956년 절두산 치명터를 매입하고, 만 10년이 지난 1966년 병인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1967년 10월 21일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과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당시 절두산순교기념관으로 명명)’을 건립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절두산에 건립될 기념관의 설계를 공모하였는데, 이곳의 원형을 조금도 변형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원형을 보존해야만 병인박해 당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숨결을 오늘날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설계도 가운데 이희태의 작품이 채택되었다. 이희태가 제출한 기념관의 설계는 한정되고 협소한 지역에서 성당과 기념관을 유기적으로 배치하여 두 공간이 서로 일체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전체적으로 순교정신의 상징과 한국적 토착성, 그리고 전통적 고유미가 건축을 통해 드러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대궐 기둥과 같은 회랑의 원주, 초가집 지붕과 같이 미끄러진 추녀, 조상들이 쓰던 갓 모양을 한 성당 내부 제단 위 천개 등이 바로 그것이다
1972년에는 김대건 신부 동상 축복식이, 1978년에는 성모동굴 축복식이 거행되었고, 1984년에는 성전 지하에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 중 27위 성인과 1위의 무명순교자를 모신 유해실이 개축 완료되었다. 그리고 1997년 11월 11일에는 절두산 순교성지 일원, 즉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절두산 일대는 오랜 세월 동안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곳으로, 개화의 물결 속에서 맞이했던 크나큰 변화를 말해주는 역사의 터전이자 교회사의 순교성지였기 때문이다. 이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성지는 있었으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성지는 절두산이 처음이었다.
절두산은 해마다 국내외 각지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성지가 되었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27위 한국 순교성인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와 박해를 기록한 사료와 순교자들의 유품들을 박물관 전시를 통해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과 103위 시성식을 맞아 특별 방한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이 바로 이곳 절두산이며, 1985년 1월 방한한 마더 데레사 수녀도 특별히 이곳을 순례하였다.
2018년 9월 ‘천주교 서울 순례길’이 교황청 공식 승인을 받은 세계 국제 순례지가 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자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인 모두의 순례지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